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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5주년’ 홀트아동복지회

2020.10.12

 

 

홀트아동복지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입양을 시작으로 아동의 행복을 위한 아동 중심의 사회복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설립자 해리 홀트씨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 속에 있는 한국 고아 여덟 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부인 버다여사와 함께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아이들이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쳐 직접 산을 개간하고 밭을 일군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돌보다 그들이 손수 일군 홀트일산복지타운에 묻히셨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Harry Holt (1905~1964)

전쟁이 남긴 상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무수한 비극의 상흔을 남겼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가정을 잃은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해마다 늘어나 1961년에는 그 수가 4,453명에 이르렀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영아원과 육아원도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 또는 양육능력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대다수였으며 이들은 시설에서 성장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행정 기능을 상실했던 정부는 긴급구호가 필요한 아동의 실태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때문에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한 시설은 여러 사회・종교단체와 외국의 구호 기관이 지원하는 구호 물품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전쟁 후 혼혈아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는데 이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을 아버지로 둔 아이들로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채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8명의 전쟁고아를 입양하다


1954년 월드비전의 밥 피어스 회장은 한국의 고아들을 돕는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쟁 기간 중 아이들이 겪은 고통을 기록 영상으로 담아 미국 전역의 극장에서 상영했습니다. 해리 홀트(Harry Holt) 가족도 이 기록 영상을 통해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는 한국의 고아들을 보았습니다. 깊은 연민을 느낀 홀트 가족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단순히 후원금을 보내는데 그치지 않고 여덟 명의 한국 혼혈 고아를 입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미 여섯 명의 친자녀가 있는 50세, 51세의 부부였지만, 아이들이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따뜻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아동을 입양하겠다는 홀트 부부의 결심은 몇 가지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군인이 아닌 일반인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자격이 제한되어 있어 유엔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한 1953년 미국에서 제정된 ‘난민 구호법’은 한 가정에서 입양할 수 있는 아이를 두 명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는 ‘특정 전쟁고아들의 구제를 위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해리 홀트 씨는 뉴버거 상원의원에게 자신의 입양계획을 담은 편지와 혼혈아 여덟 명의 입양을 허용해달라는 의안 제출 청원서를 발송했습니다.
1955년 5월, 마침내 홀트 씨는 한국에 도착하여 전국 각지를 돌며 자신이 입양하게 될 8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직접 목격하고 더 깊은 슬픔과 연민을 느낀 그는 8명의 아이뿐만 아니라 ‘선택’ 받지 못한 다른 많은 아이들도 도와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꿈이 되기까지


해리 홀트 씨가 한국에서 고아원을 돌아보는 동안 미국에서는 뉴버거 상원의원의 주도로 ‘특별 청원안’ 의안 발의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뉴버거 상원의원은 상원 연설에서 ‘난민구호법이 두 명 이상의 입양 고아들에게 특별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민 허가 국가 순위가 네 번째인 한국의 입양아들이 미국에 들어오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며, 청원안에 따라 ‘홀트 부부가 입양하려는 여덟 명의 한국 아이들을 곧바로 데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청원안은 만장일치로 상원을 통과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으로 법적 문제가 완결되었습니다.

1955년 10월 12일, 해리 홀트 씨는 삶의 전환점이 된 생애 첫 한국 방문을 마치고 고국인 미국으로 향했습니
다. 자신이 입양한 여덟 명의 아이들과 다른 가정에 입양을 소개해준 4명까지 포함해 총 열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였습니다. 이날은 홀트아동복지회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훗날 한국 아동복지사업의 이정표를 세운 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홀트 부부의 한국 전쟁 고아 입양 이야기는 미국 전역에 퍼져 곳곳에서 입양 문의가 쇄도했습니다. 이에 홀트 부부는 한국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을 지속해서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일임을 깨닫고, 1956년 마침내 ‘홀트씨해외양자회(現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1964년, 해리 홀트 씨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미국의 고향이 아닌 한국의 일산원(現 홀트복지타운)에서 치러졌습니다. 부모를 잃고 상처와 고통 속에 살던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과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헌신했던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 곁에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그의 꿈은 다른 이들의 꿈이 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받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Bertha Holt (1904~2000)

 

부인 버다 홀트 여사는 ‘해리 홀트 할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사랑으로 빈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1964년 남편 해리 홀트 씨가 소천한 후 14명의 자녀의 어머니(6명의 자녀와 입양한 8명의 자녀)로서 홀트씨해외양자회(現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생활했습니다.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아이들의 인자한 할머니로서 모든 사랑과 열정을 바쳐 홀트아동복지회 사업을 이어나갔습니다. 1978년부터 일산원(現 홀트복지타운)에 머물며 지적장애아동들과 함께 생활하며 봉사했습니다. 팔순을 넘긴 이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온 버다 홀트 여사는 2000년 96세를 일기로 소천하였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설립자 해리 홀트 씨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동·청소년, 미혼한부모와 장애인, 지역사회와 다문화가정 등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을 지원하는 전문적인 복지서비스를 펼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해외 빈곤아동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