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소개
스토리
자립준비청년 에세이집 《나의 단어》첫 번째 이야기
윤경이의 단어, ‘안식처’
2024.06.17
《나의 단어》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실시한
자립준비청년 자조모임 ‘위드유 커뮤니티’의 활동 결과물로 제작된 에세이집입니다.
5명(김남중·김윤경·박태양·안준·이다원)의 자립준비청년들은 위드유 커뮤니티를 통해 에세이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단어를 4가지씩 선정해 자기만의 소중한 추억과 행복한 경험, 꿈과 다짐이 담긴 글들을 작성했습니다.
그 글들 중 감동을 주는 에세이를 하나씩 뽑아
앞으로 5회에 걸쳐 <홈페이지 스토리>와 <홀트소식>에 싣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립준비청년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찬 미래에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세요.


일곱 살 무렵, 나의 안식처는 이불 안 ‘빈 공간’이었다.
책상에 이불을 깔고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안식처가 만들어지는데,
나의 공간에 동생을 초대해 멋진 식사를 제공하고, 비밀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거미집에 코딱지를 넣어두었던 일, 옆집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랑 놀고 온 일과 같은
은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깔깔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밥상 가지고 뭐 하냐는 할머니의 큰 호통 소리가 들리면
슬며시 기어 나와 이불을 개며 나의 안식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노름하는 날이면 더 신나게 우리의 안식처를 즐겼다.
그런 날은 더 큰 상을 펼치고 더 크고 폭신한 이불을 깔았다.
동생과 누룽지를 나눠 먹고, 엄마가 집을 떠날 때 두고 간 원피스를 입으며 공주 놀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기찻길 옆 구멍가게에 다녀온다며 밥 잘 차려먹으라는 말을 하고 나갔다.
어김없이 우리의 안식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급하게 집으로 왔고 이불을 치울 새도 없이 잔뜩 찌푸린 얼굴의 아빠도 들어왔다.
아빠는 매서운 눈으로 할머니를 노려보며 “망할 노인네가 노름으로 자식 인생 망친다” 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서운 아빠 밑에서 할머니가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불 밖으로 나와 아빠에게 마구 휘둘리는 할머니를 안고 같이 빌었다.
“아빠 그만해주세요. 할머니 때리지 마세요.”
눈물을 흘리는 우리 부탁 때문이었는지, 화가 사그라들어서였는지 아빠가 때리는 걸 멈췄다.
대신 집에 있는 물건들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안식처도 그렇게 망가졌다.


열두 살이 됐을 때, 아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시설로 가게 되었지만,
나의 안식처는 아빠가 망가트린 그날에 멈춰 있었다.
함께 살게 된 아이들의 시선에 ‘이방인 세 자매’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특히 우리 세 자매 중 한 명이라도 누군가와 싸움이 나면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힘을 보탰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눈엣가시였다.
한바탕 싸움을 끝낸 어느 날, 원장님은 언니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희 세 자매가 다른 아이들의 몫까지 빼앗아 여기서 사는 거니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라.”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아이가 원장님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고,
우리는 매일 옷방에서 증오의 시간을 가지며 우리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시설을 나온 후로는 안식처는커녕 오래 머물 공간도 없어
부랑자처럼 박스 몇 개를 들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공간의 부재는 생각보다 큰 공허로 다가왔다.
명절이 되어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짐을 쌀 때면, 나는 그 공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는 돌아갈 고향도, 집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내는 공간에 몸을 뉠 뿐이었다.
남들에게는 찬란하고 빛나는 스무 살이 내겐 어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안식처는 캄캄하고 외로울 뿐이었다.


일 년 뒤, 오랫동안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져 쉽사리 잠도 오지 않았다.
늘 남의 공간을 빌려 쓰는 것 같아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이 집을 나의 안식처로 만들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들이고, 나의 취향이 담긴 가구를 만들어 놓아두었다.
이젠 나의 공간에서 어린 날의 기억처럼 친구도 초대하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깔깔 웃으며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집에 있는 내 옷들을 친구에게 입히며 패션쇼를 벌이기도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굴레 속에서도 내 안식처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평화롭다.
편히 몸을 맡기고 기댈 수 있는 공간의 존재는 큰 위로를 가져다준다.
내 지붕이 되어줬던 따뜻한 이불처럼 말이다.


내가 만든 책상 앞에 앉아 오래 사색하고, 내가 좋아하는 향을 피우고,
읽고 싶은 책을 침대 머리맡에 쌓아놓으며 하루, 한 달, 한 해가 지났다.
집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흔적과 얼룩이 남아
마침내 내 집은 나를 표현하는 안식처가 되었다.
함께 자립준비청년을 응원하고, 텀블러도 선물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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